공정함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은
대체로 한 가지 분명한 신념을 품고 삽니다.
"옳은 건 옳고, 틀린 건 틀리다.
그러니 언젠가는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."
참 깔끔하고 논리적인 전제죠.
문제는 조직생활을 좀 해보면 이 믿음이
현실과 꽤 자주 어긋난다는 걸 뼈저리게
느끼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.
틀렸다고 해서 꼭 실패하는 것도 아니고,
바르게 행동했다고 해서 반드시 보상받는
것도 아니거든요.
"저건 분명히 선 넘었는데?" 싶은 일도
구렁이 담 넘듯 지나가고, "저래도 되나?"
싶은 사람이 떵떵거리며 잘 지냅니다.
세상이 내 가치관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
걸 깨닫는 순간부터, 공정함을 중시하는
사람일수록 속이 더 까맣게 타들어 갑니다.
그냥 넘기자니 양심이 불편하고, 팔을
걷어붙이고 바로잡으려 들면 안 보이는
거대한 벽에 부딪히기 일쑤니까요.
이 답답함 속에서 우리는 흔히 두 가지
함정에 빠지곤 합니다.
하나는 괴롭기 싫어서 불공정을 슬그머니
눈감아 버리는 것이고, 다른 하나는
저 사람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며
내 피 같은 에너지를 갈아 넣는 겁니다.
솔직히 둘 다 그렇게 좋은 방법이라고 볼 순 없습니다.
내 기준을 버리는 것도, 나를 갉아먹는
것도 결국엔 깊은 상처로 남거든요.
그래서 우리에겐 세 번째 선택지가 필요합니다.
공정함이라는 내 기준은 끝까지 꽉 쥐고
있되, 저 불공정한 사람을 뜯어고치는 걸
내 과제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.
얼핏 들으면 모순 같지만, 내 신념을
지키는 것과 그걸 남에게 억지로
들이밀어 관철시키는 건 완전히 별개의 문제니까요.
예전에 모시던 임원 한 분이 직장 내
불공정함에 열을 올리던 저에게 툭
던지신 말씀이 있습니다.
"사람 굳이 이해하려고 애쓰지 마.
그냥 분류만 하고 끝내."
그땐 그 말이 이해도 안되고 참 차갑게만
들렸는데,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만한
처세술이 없더군요.
우리는 꼴 보기 싫은 사람을 마주하면
"대체 왜 저러지? 왜 저렇게까지
뻔뻔하지?"라며 자꾸만 이유를 찾으려 듭니다.
그런데 바로 그 '이해하려는 노력' 자체가
감정 소모의 늪으로 빠지는 출발점이거든요.
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의 행동을
이해하려고 계속 그 사람의 행동을
곱씹어야 하고,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
계속 생각해야 하니 생각할수록
내 감정이 거기에 꽁꽁 묶여버리니까요.
그럴 땐 그냥 '분류'의 딱지를 붙이고
생각의 회로를 과감히 끊어버리세요.
- 저 사람은 남을 통제해야 직성이
풀리는 타입이구나
- 인정 욕구가 비정상적으로 강하네
- 자기 방식만 정답이라고 믿는 부류구나
이렇게 규정하고 마침표를 찍는 겁니다.
이유를 파고들거나 뜯어고치려 하지 말고
"그냥 저런 인간이군" 하고 털어버리면,
신기하게도 내 감정의 에너지가 확 세이브됩니다.
의도를 오해하지 말아주세요.
이건 세상에 대해 냉소적으로 살라는 게
아니라, 내 소중한 멘탈을 어디에 쓸지
스스로 결정하라는 의미니까요.
냉정하게 손익을 따져볼까요?
얌체 같은 사람을 떠올리며 분통을
터뜨릴 때, 진짜 대가를 치르는 사람은 누구인가요?
정작 그 사람은 발 뻗고 잘 자는데,
억울해서 잠 못 이루고 일상에 지치는 건
나 자신입니다.
그 분노에 대한 청구서는 상대방이 아니라
늘 내 감정의 계좌로 날아오는 것이거든요.
그래서 감정을 낭비하지 않도록 지키는
것은 단순한 양보가 아니라 나를
보호하는 강력한 방어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.
이런 불공정은 회사 안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.
권력이 뭉친 곳이라면 어디든 똬리를 틀고 있죠.
가질 수 있는 힘의 크기가 커지는 집단일수록
눈뜨고 코 베이는 상황도 잦아집니다.
그렇다고 모두가 입을 꾹 다물면 세상은
1밀리도 바뀌지 않겠죠.
세상이 아주 조금씩이라도 앞으로
나아갈 수 있는 건, 불공정 앞에서
기꺼이 분노할 줄 아는 사람들이 있기
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.
다만, 그 분노가 나를 잿더미로
태워버리는 방식이어선 안되겠죠.
순간 확 끓어올랐다 제풀에 지쳐
쓰러지는 사람은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합니다.
진짜 변화를 이끌어내는 사람은 감정에
휩쓸리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기준을
단단히 지키는 사람, 그래서 지치지 않고
오래 버틸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요?
공정함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면서도,
불공정한 이들에게 내 감정을 저당 잡히지 않는 것.
모순처럼 보이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
품고 가는 것이야말로 거친 세상을 길게,
그리고 단단하게 살아가는 가장 지혜로운
태도일 겁니다.
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분들이 세상의
불공정에 맞서고 있습니다.
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
부끄럽고 죄송합니다.
부당한 힘은 늘 침묵을 먹고 자랍니다.
아무도 말하지 않으면,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 됩니다.
그 침묵을 깬 사람들이 있기에 세상은
멈추지 않고 조금씩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거겠죠.
두려움이 없어서 나선 것이 아닐 겁니다.
두려움을 안고도 한 걸음 내디딘 것이겠죠.
저처럼 그 두려움 앞에 머뭇거린 사람에게,
그 용기는 결코 작게 보이지 않습니다.
당신들이 옳습니다.
그리고 그 옳음은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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