추억 하나 쯤은
목 매달고 애원했던 것들도
세월이 지나면
뭐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다.
끊어지고 이어지고 끊어지는 것이
인연인가 보다.
- 용혜원
어제까지 간절하게 붙들고 있던 것이 오늘은 왜 이렇게 시시해 보일까요? 밤잠을 설치며 걱정했던 일들이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“내가 왜 그걸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했을까?” 싶을 정도로 가벼워지는 경험, 저만 그런 건 아니겠죠?
요즘 사회에서는 유난히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는 압박이 강해요. SNS를 열면 누군가는 이미 성공했고, 누군가는 꿈을 이뤘고, 나만 제자리걸음인 것 같은 불안감이 끊임없이 밀려오죠. 그 불안이 커질수록 우리는 더 간절하게 무언가에 목을 매달게 되고, 그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치 세상이 끝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요.
그런데 신기하게도, 그 간절함의 대상이 몇 년 후에도 여전히 간절한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더라고요. 용혜원 시인의 말처럼 “목 매달고 애원했던 것들도 세월이 지나면 뭐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다”라는 게 정말 맞는 것 같아요.
지리산이 가르쳐주는 인생의 진리
저는 마음이 복잡하거나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고 싶을 때면 지리산 같은 큰 산을 떠올려요. 단순히 높은 산이 아니라 긴 호흡으로 오래도록 걸을 수 있는 산이거든요. 한 번에 정상을 찍고 내려오는 게 아니라, 능선을 따라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며 걷는 종주의 산이죠.
그 길을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게 있어요.
| 산행의 단계 | 인생의 순간 | 우리가 배우는 것 |
| 숨 가쁜 깔딱고개 | 치열한 경쟁과 고난의 시기 | 힘든 순간도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 |
| 평탄한 능선길 | 노력 끝에 찾아온 안정 | 일상의 소소한 평화에 감사하기 |
| 편안한 내리막길 | 성찰과 내려놓음의 시기 | 모든 것을 통제할 필요가 없다는 것 |
산이란 오르막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이 있다는 진리가 있어서 가볼 만한 것이다.
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어요. “그 진리가 있어서 가볼 만한 것”이라는 표현이 너무 정확하게 마음을 건드렸거든요.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요?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, 그래서 살아볼 만한 거라는 것.
힘든 시간 한가운데 있을 때는 이 오르막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. 하지만 산을 걸어본 사람이라면 알죠. 아무리 가파른 고개라도 반드시 끝이 있고, 그 끝에서는 탁 트인 전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요.
시간이 주는 가장 조용한 위로
“내가 왜 그런 걱정을 하고 살았을까” 싶을 정도로 지나고 보면 별것 아닌 일들. 이게 단순히 우리가 무감각해진 게 아니에요. 오히려 시간이 우리가 붙들고 있던 것들의 무게를 조용히 조정해준 것이거든요.
현대인들이 유난히 불안해하는 이유 중 하나는 '지금 이 순간’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에요. 마치 지금 성공하지 못하면, 지금 해결하지 못하면 영원히 기회가 없을 것처럼 느끼죠. 하지만 인생은 100년이라는 긴 여정이에요. 지금 당장 해결되지 않는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나는 건 아니거든요.
시간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들
- 급하게 느껴졌던 것들이 사실은 그렇게 급하지 않았다는 깨달음
-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의 상대적 가치 인식
- 지나간 아픔들이 오히려 지금의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는 이해
-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온 새로운 기회들에 대한 감사
그래서 저는 요즘 힘든 일이 닥치면 이렇게 마음을 돌려보려고 해요. “이것도 언젠가는 추억이 되겠지. 몇 년 후에는 이 시간을 웃으면서 이야기하게 되겠지.” 완벽하게 되는 건 아니지만, 이렇게 마음의 방향만 살짝 돌려도 견딜 만해지더라고요.
끊어지고 이어지는 것이 인연의 본질
용혜원 시인의 시 구절 중에 특히 마음에 와닿는 부분이 있어요.
끊어지고 이어지고 끊어지는 것이 인연인가 보다.
이 짧은 문장이 관계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뒤바꿔놓는 것 같아요. 우리는 인연이 한 번 맺히면 영원할 거라고 쉽게 믿어요. 그래서 관계가 끊어지면 내 탓 같고, 상대 탓 같고, 세상 탓 같고…
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끊어지고, 이어지고, 또 끊어지는 것 자체가 인연의 자연스러운 흐름인지도 모르겠어요. 계절이 바뀌듯, 인연도 그 시기가 있는 거죠.
인연에 대한 새로운 관점
- 지금 내 곁에 없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, 그 인연의 계절이 지난 것일 수 있다
- 억지로 붙들어두려 했던 관계보다,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관계가 더 건강할 수 있다
- 떠나가는 인연에 너무 아파하지 말고, 다가오는 인연을 억지로 밀어낼 필요도 없다
- 내게 머무는 동안 최선을 다해 아껴주고, 떠날 때는 가벼운 마음으로 손을 흔들어 줄 수 있는 여유
이렇게 생각하면 끊어진 인연에 대한 마음도 조금은 가벼워지지 않나요? 모든 관계에 목을 매달며 나를 갈가리 찢지 않아도 된다는 게 얼마나 큰 위로인지요.
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길목을 향해
최복현 작가의 글에서 가장 깊게 공명한 문장이 있어요.
인생이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목을 향해 나가는 것이니까.
생각해보면 우리는 늘 처음 가는 길을 걷고 있어요. 취업도, 결혼도, 육아도, 이별도, 나이 드는 것도. 아무리 주변에서 경험담을 들어도, 막상 내가 그 길목에 서면 완전히 새로운 감각으로 다가오죠. 지도가 없는 여행을 하고 있는 셈이에요.
그래서 인간은 잘난 사람이건 못난 사람이건 늘 배우며 살 수밖에 없는 거예요. 세상 이치를 다 알 것 같은 심정이 드는 순간에도, 예기치 않은 일들이 불쑥 끼어들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게 만드니까요.
그 길목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들
- 때로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설렘
- 때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
-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만남
- 그리고 그 만남이 만들어내는 인생의 전환점
우연이든 숙명이든, 그 길목에서 맞닥뜨리는 사람과 사건들이 결국 내 인생의 결을 만들어가는 거예요. 그러니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몰라도, 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 자체가 이미 의미 있는 일이에요.
“그러려니 하고 살아야 잘 사는 걸까요?”
저는 그 답이 '예스’라고 생각해요. 단, 조건이 있어요. 이때의 '그러려니’는 체념이나 무관심이 아니에요. 오히려 충분히 경험하고, 충분히 느끼고, 그 위에서 흘려보내는 능동적인 수용이에요.
억지로 애쓰지 않아도 흘러가는 것들은 흘러가게 두고, 지금 내 앞에 있는 것들에 조금 더 집중하는 것. 걱정했던 것들이 별거 아니었다는 걸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는 게 아니라, 지금 이 순간에도 '이 또한 지나가리라’는 믿음을 갖는 것.
그게 인생의 산을 오래, 그리고 끝까지 걸어갈 수 있는 힘이 아닐까요?
지금 우리는 어디쯤 걷고 있을까
우리 모두는 지금 각자의 인생 종주길 어딘가를 걷고 있어요. 누군가는 숨 가쁜 오르막 한가운데 있을 거고, 누군가는 잠시 평탄한 능선을 걷고 있을 거예요. 또 누군가는 오래 기다리던 내리막을 드디어 만난 참일 수도 있고요.
어느 구간에 있든, 한 가지는 분명해요. 이 길은 반드시 이어진다는 것. 오르막 뒤에는 내리막이 오고, 힘겨운 구간 뒤에는 숨 고를 자리가 생기고,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길목에서 예상치 못한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기도 한다는 것.
목 매달며 원했던 것들이 세월이 지나 별것 아니게 느껴지는 날이 오듯, 지금 내가 힘겹게 오르고 있는 이 고개도 언젠가는 “그때 그 고개가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구나” 하고 웃으며 돌아볼 날이 올 거예요.
그러니 오늘도, 한 걸음씩. 천천히 걸어가 봅시다.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너무 마음 졸이지 마시고,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펼쳐진 길을 온전히 느끼며 걸어보세요.
추억 하나쯤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거니까요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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